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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보훈의달 메르스 그늘에 묻힌 형국
기사입력 2015-06-18 오후 11:11:00 | 최종수정 2015-06-18 23:11        



 언론인 김명용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 까지는 목숨 바쳐 나라에 헌신한 호국 영웅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라는 괴질로 온통 빨간불이다. 호국 보훈의 달이 메르스의 달로 바뀐 착각마저 든다.

벌써 한달째이나 호전 기미는 안보여 국민들은 하루 하루 생활이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렇더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영웅들은 잊을 수는 없으리라.

국가 보훈처와 교육부 우정사업본부는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나라 최초로 6.25전쟁 호국 영웅 10인을 선정하고 이들의 호국 영웅 우표 10종 1000만장을 발행 했다. 뒤늦은 일이나 의미 있는 일로 평가 된다.

선진국처럼 이들 호국 영웅을 기억하고 후대에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다. 이 우표는 언제나 사용 할수 있는 가격을 표시 않은 영원 우표이다. 우표에 오른 이들 10인을 살펴보자.

심일(沈(鎰)소령은 1923년 함경남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교육자의 길을 가기 위해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38선과 북한에 공산당이 있는 한 위험이 상존 하고 남자는 의롭게 살아야 한다’며 자진해 육군 사관 학교에 입교 했다.

육사 졸업(8기)과 6.25 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당시 6사단 7연대 대전차중대 2소대장(소위)으로 배속돼 탱크를 몰고 남하하는 적 탱크(SU-76 자주포)와 조우했다. 적 전차는 아군의 대전차 공격에도 끄덕 않고 포탄을 퍼부으며 계속 전진해 왔다 그는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부하들에겐 주위를 엄호 하도록 하고 자신은 적의 전차 포탑위로 단신 돌진해 해치를 열고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 했다.

무려 3대의 북한군 전차에 이를 감행 했다. 이러자 밖으로 뛰쳐 나온 북한병사들은 대기 시켜 놓은 부하 특공조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이로써 SU-76 자주포 3대가 격파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충북 음성지구 전투등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7사단 수색 대장으로 영월 지역 수색 도중 적 총격을 받아 28세의 나이로 산화 했다. 영월 소연강에 그의 전적비가 있고 위급 장교로는 한국 최초로 태극 무공 훈장과 함께 소령으로 특진 했다.

김교수 대위는 함경남도 함흥 신보리에서 태어나 흥남 공대를 2년 수료한 후 월남 했다. 1951년 육군종합 학교에서 마지막 기수인 제32기로 소위에 임관됐다. 6.25전쟁때 초급 장교를 보충하기 위해 창설된 이 학교는 6.25 전쟁 발발해인 1950년 8월 15일부터 1년간 총 32기 7288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당시 최 일선 소대장의 70% 이상이 이 학교 출신들일 정도 였다. 그런만큼 희생자도 많아 3분의 1이상이 전사 하거나 전상을 입었다. 육군 6사단 2연대 2대대 6중대장이던 그는 1953년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마지막 공세를 펼치던 중공군의 화천 교암산 7.13 전투에 참전 했다가 적의 포탄으로 그가 구축한 진지가 모두 파괴 되고 6중대 전원이 포위되는 위기에 처했다.

적 포격속에 비까지 내리고 통신망 마저 끊겨 진퇴양난이 되자 그는 혼자 몸으로 선두에 서서 수류탄을 터뜨리고 총검을 휘두르면서 최후까지 싸웠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그는 전사 했다.

이 전투에서 살아 남은 병사는 단 6명뿐 이었다. 그의 용감한 전투 정신으로 각 연대와 사단들은 안전하게 철수 할 수 있었다.

이근석(李根晳)공군 준장은 평남 평원군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평양 고보를 졸업하자 곧바로 일본 구마다니 비행학교에 입교해 뛰어난 조종사 재능을 보여 교관들로 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이 학교 수료후 당시 최정예 조종사만 들어 갈수 있다는 요시오카 전투 비행부대에 들어 갔다.

광복후 조국에 돌아와서는 당시 최용덕 김정렬 등과 공군 창설에 주력 했다. 하지만 6.25 전쟁때 우리 군에는 한 대의 공군 전투기도 없었고 다만 연락기와 정찰기 30여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1950년 이근석 대령등 10여명의 조종사를 일본 이다쯔께 기지에 급파해 미군이 대한민국에 제공한 전투기 10대를 직접 몰고 오도록 했다. 이 대령을 제외한 다른 조종사들은 이 전투기가 생소 했으나 이 대령의 조종 교육으로 무사히 국내 기지로 까지 올수 있었다.

1948년에는 육군항공기지 사령부 비행 단장이 됐으며 대령이 되던 해 공군이 육군에서 독립 되자 공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이 됐다.

6.25전쟁 발발 당시 비행단장이던 그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기습 남침해 오자 전투기가 없는 상황에서 경비행기 22대를 총동원해 포탄을 손으로 직접 투하 하면서 적의 서울 진입을 24시간 지연시켰다.

그 후에도 안양과 시흥 상공에서 남하중인 북한군 4~5천명과 적 탱크 20대를 공격해 큰 전과를 거두었고 남침 북한군의 저지를 막기 위해 재차 공격에 나섰다가 적의 대공포에 명중돼 귀환가능성이 없자 적 전차로 돌진해 애기와 함께 산화 했다. 정부는 당시 대령인 그에 공군 최초의 태극무공 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 했다.

진두태(陳斗台)해병중위는 1927년 경남 함안출신으로 병조장(원사)로 입대해 해병대 창설에 참여 했다. 6.25 전쟁 전까지는 제주 4.3사건의 진압에 참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6.25 전쟁때 적과 교전중 포로가 됐으나 탈출에 성공해 아군의 북진 전투에도 참가 했다. 원산 상륙 작전을 비롯해 고성, 함흥지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1951년 3월 다른 전투 참가를 위해 허리까지 차는 대관령의 눈길을 뚫고 1개 분대를 이끌며 진격 하다가 매복 중인 적에게 포위됐다. 하지만 그는 부하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신 시킨 뒤 혼자의 몸으로 적과 교전해 수명을 사살하고 끝내는 희생 됐다.

1시간 뒤 부하들이 전투 현장에 갔을때 그의 모습은 정체를 알아 볼수 없을 정도였다. 평소에도 해병중의 해병이란 말을 들어온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부하 사랑을 외면하지 않았다.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 그의 흉상이 있으며 24세의 나이에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이 추서 됐다.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 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후 조선 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을 펼쳤다. 광복후 귀국해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 인민군들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돼 빨치산 토벌 대장으로 복무 했다.

6.25 전쟁중에는 빨치산 토벌을 담당 하는 전투 경찰에 근무하면서 당시 조선공산당 총 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가 사살되자 빨치산의 기세가 꺽이고 토벌 작전을 마무리 하는 계기가 됐다. 이 공적으로 그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1계급 특진됐다.

그러나 그는 빨치산들의 귀순을 유도 하고 목숨을 살려 주는등 빨치산 총 사령관 이현상도 화장해 하동 송림에 뿌리는 장례까지 치러줘 상부로 부터 큰 질책을 받았다. 이 때문에 부하 직원에게는 태극무공훈장 3개가 수여 됐으나 그는 받지 못했다. 지리산 주변의 모든 사찰을 소각하라는 지시도 외면 하는 소극성을 보여 상부의 미움을 더 샀다.

그 때문에 좌익 혐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화엄사를 비롯한 천은사 ,쌍계사, 금산사, 백양사,선운사 등 지리산 주변의 사찰들은 화마를 벗어 날수 있었다. 문화재청은 2008년 그를 문화재 보호 인물로 선정하고 국가 보훈처도 그를 호국의 인물로 선정 했다. 조계종은 그에게 감사장을 수여 했다.

그 후 공주 경찰서장으로 좌천됐다가 1958년 금강의 곰 나루터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 타계했다. 이때 나이 38세 였다.

손원일( 孫元(一) 해군제독은 독립운동단체의 비밀요원이며 군인, 정치가, 외교관이다. 평남 강서 출신이며 임시 의정원 의장을 지낸 목사 손정도의 2남 3녀중 장남이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우리의 바다는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늘날의 해군 모체인 ‘해병병단을 창설 했다.

그후 해군 총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 장관, 초대 서독대사 등을 역임했고 참모총장 재임시에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작전에 참전 했다.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도입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 현재 해군사관학교의 모체인 해군병학교와 해병대를 창설 했고 전사편집실과 해군악대도 발족 시켰다. 평양 광성 고보 졸업후 중국으로 가 중국 남경 중앙대학 항해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후 중국 해군의 국비생으로 독일에 가 3년간 항해학을 연구 하기도 했다. 1980년 2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자택에서 별세 했다.

밴플리트 주한 미8군사령관은 맥아더 장군이 해임된 뒤 1951년 4월 미 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때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연대장으로 참전해 전투 능력을 발휘했다. 그 후 9개월만에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에 올랐으며 중장 승진과 함께 그리스의 미 합동 군사 고문단장을 역임 했다.

여기서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활동을 잠재우는데 공헌해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미 8군 사령관으로 재직때 한국에서 군단급 규모의 공비토벌 사령부인 백 (白)야전 사령부 (사령관백선엽 소장)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 사령부 설치로 밤의 인민 공화국으로 불리던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과 북한군 패잔병을 일거에 소탕해 후방이 안정됐다.

그는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미 8군 사령관에 발탁됐고 역대 미8군 사령관중 가장 오래 재직 했다. 다른 사령관들은 재직기간이이 4개월 ~6개월에 불과 했지만 그는 2년여를 재직 했다.

한국 육사의 4년제와 20개 사단 창설에도 크게 공헌 했고 오늘날의 휴전선을 확보 하는데도 기여 했다. 그가 사령관으로 부임하자 중공군은 그의 능력을 테스트 하기 위한 두 차례 대규모 춘계공세(51년 3월, 5월)를 펼쳤으나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서울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육군 사관학교에는 동상이 세워 졌다. 자신의 외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2세도 아버지를 따라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6.25전쟁에 참전 했다가 추락으로 사망 했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 육군 사관학교 출신이고 한미 재단을 설립 하기도 했다.

윌리엄 해밀턴 쇼대위는 1922년 6월 평양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미 해군 장교로 입대해 2차 세계전에 참전했다. 그후 대한민국 해군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중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리언 대학을 졸업하고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한국에 와 해군 대위로 재 입대 했다.

해군 대위로서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 됐으며 1950년 9월 서울 은평구 녹번리 전투에 참전했다가 매복중인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28세 나이로 전사 했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금성 충무무공 훈장과 은성 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그의 한국 사랑과 희생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은평구에 추모 공원과 동상을 건립 했으며 사후 그는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 됐다.

몽클라르 중장은 6.25전쟁이 터지자 프랑스의 UN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 했다. 그는 ‘육군 중령도 좋다’며 중장인 계급장을 중령으로 낯춰 전투에 참가 했다. 그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내가 UN군으로 참전 했다는 긍지를 보여 주고 싶다’면서 육군 중령을 자청하고 프랑스 대대를 이끌었다.

1953년 7월까지 3차에 걸쳐 부대를 교체 하며 힘들고 어려운 전투를 계속 했다. 지원병만으로 구성된 프랑스 대대는 한국 도착 후 1951년 1월부터 2월 11일까지 전개된 전투에서 그 휘하의 장병들은 영하 30도를 오르 내리는 혹독한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공산군의 공격에 맞서 방어진지를 고수 하는 전공을 세웠다.

험란한 지형인 양평 지원리 전투에서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무릅쓰고 적 공격을 물리치는데 큰 전과를 올렸다.

칸 중령은 대대병력 (800명)으로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낸 한국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영국 군인이다. 경기 파주 적성면 감악산 설마리 계곡 전투에서 그는 중공군 3개 사단의 대규모 춘계공세를 방어해 인접 부대의 철수를 엄호 하고 서울 북방 방어선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죽여도 죽여도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결국 부대가 와해되고 그 자신도 결국 다른 부대장과 함께 포로가 됐다. 800여명의 부대원 중 생존자는 겨우 50여명에 불과 했다. 혹독한 포로 생활을 견뎌내고 본국에 송환돼 영국 최고의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 받았다.

설마리 계곡 전투는 세계 전사에 임진강 전투로 기록될 만큼 유명하다. 설마리 계곡에는 일반적인 영국군의 전적비가 없고 절벽위에 쌓아 놓은 특이한 구조의 전적비가 있다. 이렇게 한 것은 격렬한 설마리 계곡 전투 중 전사자들의 시신을 미처 수습할 여유가 없어 돌벽이 쌓인 곳에 임시 쌓아 두었다는 데서 유래 한다.

후일 이 지역이 안정 되고 영국군들이 동료 시신을 수습해 가면서 돌벽을 쌓고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전적지로 조성 했다. 칸 중령은 한군인을 돕고 자유민주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 했다. /언론인 김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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